예전에 500page 정도의 책 십여권으로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모든 나라의 이야기를 따라가기에는 벅찹니다. 그런데 한국사에 대해서도 동일한 수준의 분량으로 읽었었습니다. 그러니까 세계사를 십여권으로 다루었다면 이것도 내용이 부실하다는 말이 됩니다. 한국사 서적의 기준으로 서술하려면 150권 이상의 분량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당연히 이정도로 턱없이 부족하겠죠. 그런데 저자는 단 한권으로 정리하려고 합니다.
그렇기에 모든 사실 관계의 기술은 불가능합니다. 저자 스스로 '위대한 인물' 위주로 이끌어 가겠다고 말합니다. 시기를 모두 8개로 나누어 8장으로 정리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특정 인물이나 사건 위주로 설명하겠다고 해도 불충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오히려 일부만에 대해 상세히 묘사하고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겠죠. '앤드루 마'의 "세계의 역사 A History of the World"는 세계사를 알기 위해 읽기 보다는 이미 대부분의 내용을 아는 사람이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읽어야 효과적입니다.
내용 구성이 간략하여 이미 배경적 사실들을 아는 사람에게 도움이 됩니다. 저자는 헤로도토스를 '역사의 아버지'이기도 하지만 '거짓말의 아버지'라는 평가도 있다고 전합니다. 콜럼버스도 '사기꾼'이란 평판이 있습니다. 저자 역시 헤로토투스처럼 자신의 상상력과 감상으로 각각의 챕터와 문장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역사서는 사실과 이에 대한 저자의 해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많은 사실이 전달되어야 독자가 읽으며 자신만의 상상력을 넣어 완성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사고과정에 역사가가 끼어들게 됩니다. 글을 쓰는 저자가 가장 앞선 독자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아예 사실이 아니라 해석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저자의 편향적 생각의 방향으로 결론이 나게 됩니다. 이정도는 어쩔 수 없는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나아가 아예 사실관계를 바꾸기도 합니다. 재해석이라고 포장하지만 실제는 기존 사건 목록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만 추려낸 조작입니다. 이런 이념적 사기꾼들은 아예 사실 관계를 정말로 '변경 조작'하기도 합니다. 사실 보다는 자신의 이념을 현실화하기 위한 당위성이 중요하니까 양심의 가책도 없습니다.
다시 일반적 역사서 서술로 돌아가 살펴봅시다. 내용이 방대하면 사건 기록으로 산만해지고 저자의 주장만 듣다보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게 됩니다. 두 가지 요소를 잘 조합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상당한 자료들을 모아 정리하고 가능한 공정하게 '객관적 해석'을 해야 합니다. 그런 사건 사이에서 '지혜'는 스스로 떠오르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많은 역사가는 주관적 해석의 유혹에 시달리나 봅니다. 이 책도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저자의 주관적 주장을 객관적 사건으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잘못된 해석과 틀린 사실에 반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독서의 주의점을 적다보니 마치 엉터리 책처럼 보이는군요. 하지만 저는 매우 재미있고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저자는 연대기 순으로 계속 이어지며 기술하지 않고, 인물 위주로 각각의 독자적인 에세이로 써놓았습니다. 8개의 챕터는 개별적인 수십개의 글로 구성되었습니다. 글 사이에 연결이 없습니다. 그래서 알고 있는 내용의 해석에서는 엉터리에 가까운 부분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워낙 간략히 사건을 정리하니까요. 반면에 기술되지 않고 비어 있는 사실들의 간격을 상상력으로 메꾸며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미 알고 있기에 기존 지식으로 보완하며 읽은 겁니다. 오히려 재미가 더해진거죠.
이와 달리 잘 모르는 역사에 대해서는 간격이 너무 넓어 황당했습니다. 도대체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데 저자는 의견을 던지고 있으니까요. 어쨋든 모르던 부분에 대한 설명은 결국 도움이 되었습니다. 중대한 정치, 군사적 사건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개인적 사건들을 추적하는 기술이 남달랐습니다. 저자가 전문 학자가 아니라 정치 평론가 출신이고, BBC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으로 기획된 것이어서 그렇겠죠. 특정 인물의 개인사가 어떻게 인류에게 영향을 미쳤는지 살피고 있습니다.
가령 천연두를 극복한 제너의 이야기를 들 수 있습니다. 당시 시대에는 우두 치료법으로 어느 정도 해결방법이 알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제너가 완전히 독창적으로 해결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세상에 완전히 새로운 창조는 없습니다. 기존 지식의 모방과 조합으로 창조물을 만듭니다. 그렇기에 제너의 업적을 비하할 이유는 없습니다. 또한 민간에 치료법이 알려진지 이미 수십년 수백년이 자났는데도 과학적으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극복한 성과가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사건의 뒤를 캐는 저자 특유의 스토리텔링 방식입니다. 매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또한 1차 세계대전 시기의 독일 외무장관이자 관료인 치머만이 있습니다. 관료주의의 태동에 대해 말하면서 예로 들고 있습니다. 저자는 평범한 인물로 보이는 치머만이 누구보다도 더한 악당이지 않겠냐고 묻습니다. 관료로서 자신 앞에 놓인 일을 열심히했지만, 결국 인류사에 무수한 오점을 남깁니다. 특히 스위스에 있던 레닌을 열차에 태워 러시아에 투하시긴 일이 있습니다. 그로 인해 마르크스 혁명이 성공하고 무수히 많은 사람이 학살되고 인류의 불행이 되었습니다.
저자의 다음 문장은 너무나 마음에 듭니다.
"마르크스주의는 거짓 '과학'으로 포장된 역사의 해석이었고, 나치즘은 인종을 사이비로 규정한 진화생물학이었다."
책 전체 성격을 대표하는 에세이는 '캐서린과 머거릿'입니다. 20세기 미국의 여권 운동가 2명이 70대 노파가 되어 '경구용 피임약'을 개발하게 시킵니다. 엄청난 연구비를 지원한 결과입니다. 이들의 20대부터 시대 변화를 따라가는 것도 좋았고, 개인의 활동을 생생하게 묘사해가는 것도 좋았습니다. 거대한 시대흐름과 주인공의 개인적 고민까지 엿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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