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9-05

마흔두 개의 초록, 마종기 시인의 시집

저에게는 매번 시집이 나올 때마다 믿고 보는 시인들이 있습니다. 마종기 시인의 시집을 사두고서 그동안 계속 읽어 왔습니다. '마흔두 개의 초록'은 열한 번째 시집이라고 합니다. 이번에도 읽으면서 만족스러웠습니다. 시인의 부드러운 언어에 즐거웠습니다. 정확한 표현인지 모르겠으나 어쨋든 저에게는 부드럽게 느껴졌습니다.

이번 시집에서 세 개의 시를 가지고 말하려고 합니다. 책의 끝부분에 있는 '은인을 위하여', '물의 정성분석', 악어2'입니다. 그동안 시인에게서 보아왔던 언어와 약간 다른 단어를 볼 수 있었습니다. 마종기 시인은 직업이 의사입니다. 그래서 이공계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시죠. 그렇지만 그의 시에서는 이과적 단어를 볼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나라 서정시의 아름다운 말들을 계속 볼 수 있었습니다.

마흔두 개의 초록 마종기 시인 시집

마종기 시인의 시집


하지만 위의 세 개의 시는 특별한 단어들이 나옵니다. '물의 정성분석'에서는 이미 제목에서부터 '분석'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화학 분석에는 정량분석과 정성분석이 있는데, 양을 측정하는 정량분석과 달리 정성분석은 성분을 분석한다고 이해하면 됩니다.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물질이 들어 있는지 파악하는 과정입니다.

이러한 과학적 단어를 시에 쓰기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단어는 근본적으로 수학적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시어의 특징을 가지고 있기에 은유적 사용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의사인 마종기 시인의 시에서도 이런 단어를 볼 수는 없었습니다. 제가 시인의 모든 작품을 본 것이 아니기에 단정할 수 없는 일이지만 제가 보았던 작품에서는 보기 어려웠습니다.

저는 '은인을 위하여'에서 '자투리 시간에 자란 전두엽의 뇌'라는 행을 읽고서 놀랐습니다. 뇌에서 전두엽이 어떤 기능을 하는 것인지 알아야 의미 전달이 되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뇌에 전두엽이 있다는 것은 알아야겠죠. '피질의 굴곡을 따라간 열정만으로'라는 표현은 정말 좋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든 말든 암튼 저는 정말 좋았습니다. 이어서 '잠들지 않는 뇌의 맥박을 듣는다'라는 행으로 연을 마칩니다.

시어는 작가와 독자 사이에 단어와 문장이 공명해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단어를 쓰기는 어렵습니다. 공감하는 독자가 적어지니까요. 물론 말더듬이 같은 시도 요새 많이 나오지만 아무튼 대화를 하려면 서로 아는 단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마종기 시인의 이번 시를 읽으면서 저 개인적으로는 아주 좋았습니다. 나름 이러한 단어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자랑질 해도 될까요?

마흔두 개의 초록


하지만 위의 단어들도 잘 살펴보면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건강에 조금만 관심이 있다면 전두엽에 대해서 아실겁니다. 피질이란 단어는 조금 어렵겠네요. '물의 정성분석'이란 시도 제목은 조금 어렵지만 속의 내용은 평이한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정량이 아니라 정성이란 말을 사용한 이유는 우리가 사는 인생이 쉽게 정량적으로 평가될 수 없다는 의미이지 않을까요. 이것만 알고 있다면 '함께 살기로 한 날부터 / 정성분석 실험실은 늘 젖어 있었다'라는 표현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종기 시인의 새로운 시집 '마흔두 개의 초록'을 읽으며 시인의 인생에 조금 들어가 본 듯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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